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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흥신문과 함께하는 ‘시흥역사 나들이’

기사승인 2018.08.18  11:06: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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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3. 도창동 강창말 당제(산제)

사람은 공간 속에서 시간을 구성하며 산다. 한 사람의 일생은 그가 살았던 시대의 역사이지만 남겨지지 않은 역사는 시간과 함께 흘러가 버리고 만다. 문자화되지 못한 수많은 역사는 사람의 기억 속에 남아 있다가 말을 통해서 재현되기도 하는데 바닷물이 드나들던 시흥의 갯벌은 단단한 땅으로 바뀌었고, 배가 드나들던 갯고랑에는 옛 추억이 아쉬워 찾아오는 바닷물만 오갈 뿐이다. 본지는 「시흥시사(始興市史)」를 참고해 옛 시흥의 발자취를 살펴본다. -편집자 주- 

2. 마을공동체의 의례와 신앙

시흥시 마을신앙의 제(祭)의 명칭은 경기도지역의 일반적인 사례와 마찬가지로 당제, 산제, 산신제 등으로 나타난다. 제일(祭日)은 음력 10월 초순경이 대부분이었는데 시흥시의 주요한 생업이었던 농업의 가을 추수시기와 관련이 있었다.
연간 2회의 정기의례를 행한 마을도 있지만 대부분 연간 1회의 의례를 행하였다. 여름철의 우물고사는 각 가정별로 지하수 또는 상수도가 설비되지 않았을 당시 마을 주민들의 공동 식수처였던 우물을 함께 청소하고 정기적인 의례를 치름으로써 주민들의 건강과 안녕을 기원하는 것이었다. 또 비정기적인 의례로 기우제를 지내는 경우도 부분적으로 나타났다. 마을신앙의 대상은 당제, 산제 등의 명칭에 나타나듯이 마을 내의 산과 구릉에 위치하며 ‘도당신’의 명칭이 다수 확인되었다. 과거 시흥지역 마을신앙의 특징과 현황을 살펴본다. -편집자 주-

 

2-3. 도창동 강창말 당제(산제)

도창동 강창말 당제 독축.

강창말에서는 3년에 한 번씩 음력 10월에 날을 잡아서 당제(또는 산제라고도 함)를 지내고 있다. 요즘은 음력 10월 초사흘에 하지만 예전에는 열흘 안에 좋은 날을 잡아서 지냈다. 2005년에는 음력이 빠른데다 비가 많이 왔고 추수 일정이 늦어진 까닭에 음력10월 11일에 당제를 지냈다. 옛날에는 무당을 불러 놓고 당제를 지냈다는 말이 전해 오기도 한다.
수인산업도로에서 강창말로 들어오는 길 동쪽에 있는 산에 마을을 바라보며 당나무가 서 있다. 이 당나무 앞에는 원래 이엉을 엮어서 만든 짚주저리 형태의 당집이 있었고, 당집 안에는 오곡을 넣은 단지가있었다. 원래 당나무는 소나무였으나 고사한 뒤 누군가 나무뿌리를 캐 가면서 당집도 함께 무너뜨려 버렸다고 한다. 이후 당나무가 있던 자리에서 5m 아래에 있는 도토리나무를 새로운 당나무로 모시고 그 앞에 짚주저리 형태로 새로 당집을 만들었다.

도창동 강창말 당집과 당나무.

당제 때마다 새로 이엉을 엮어서 당집 위에 두르는데 짚주저리가 너무 커지면 이엉을 벗겨 버리고 새로 만든다. 2005년 당제에는 제의 전날 남자들 몇 명이 올라가서 당 주위를 청소하고 이엉을 엮어서 짚주저리 위에 두르고 제사지낼 터를 닦았다.
당제일이 잡히면 당주를 뽑는데, 부부의 생년월일을 모두 따져서 결정한다. 당주는 제일 전까지 부부생활을 할 수 없고 하루에 한 번씩 목욕재계를 해야 한다.
지금도 이와 같은 방식으로 주로 60~70대의 당주를 뽑고 있다. 당주는 제물을 준비하는 일을 맡으며, 제사상에 올리는 쌀도 당주 집에서 수확한 것으로 올린다. 50년 전까지는 당제일을 정하면 마을에서 제일 높은 고갯길인 ‘당산길(수인산업도로에서 강창말로 들어오는 길)’과 당주집 대문간에 황토불을 피워 놓고(황토를 깔아 놓고)인줄을 둘러 여자나 상주(喪主) 등의 출입을 금하였다.
또 당제를 지내기 전 오후에 장승제를 먼저 지내고 우물고사와 부정풀이를 한 후 당제를 지냈는데 이 장승제는 약 30년 전에 사라졌다. 이때 장승제부터 부정풀이까지는 당주가 아닌 동네의 다른 사람이 제를 지냈다. 강창말에서 호조벌을 바라볼 때 우측(북쪽)에 있는 산 아래는‘대장군’, 좌측(남쪽) 산 아래에는‘여장군’의 장승이 있었다. 매년 당제 때마다 새로 장승을 만들고 예전 것은 태워 버렸다.

우물고사는 윗말과 아랫말에 있는 대동우물에서 각각 지냈다. 장승제와 우물고사는 조그만 상에 팥시루떡과 삼색과일, 북어, 술 등을 올렸으며, 장승제를 지낸 후에는 제물의 일부를 떼어 사고지(四古紙)(8)에 싼 다음 이것을 장승에 매 두었다. 2005년 당제는 낮 12시경부터 시작되었는데 예전에는 밤 10~11시경에 당제를 지냈고 근래에 들어서는 보통 오후 3~4시에 치르고 있다. 당제의 제사상은 두곳에 차리는데, 하나는 당 앞에 차리며 다른 하나는 당에서 50m가량 내려온 편평한 자리에 차린다. 당 앞의 제사상에는 소고기적, 팥시루떡, 삼색과일, 포, 술 등을 올린다.

도창동 강창말 당제 아랫상제사

당 아래의 상은 특별한 명칭 없이 ‘아랫상’이라고 일컬어졌는데 당 앞의 제물과 거의 동일하지만 소고기적 대신 돼지머리를 올리고 쌀을 담은‘당주 주발’을 놓는 것이 다르다. ‘당주 주발’에는 숟가락을 꽂아 놓고 사고지를 갓 모양으로 접어서 그 위를 덮었다. 아랫상에 차린 제물은 원래 당주가 가져가는 것이고, 음복은 당 앞에 차린 제물로만 하나 요즘은 가리지 않고 음복을 한다.
상에 올리는 술은 ‘조라술’이라 하여 당주가 사흘 전에 대동우물을 치고(청소하고) 사람이 다니지 않는 밤에 목욕재계를 한 후 당에서 우물물로 제주(祭酒)로 쓸 술을 담갔다. 제물은 모두 아랫상을 차리는 곳에서 준비하며 여자들의 출입이 일절 금지된다. 제물 비용은 마을 사람들끼리 거출하였다.
본격적인당제에앞서행하는부정풀이는상이모두차려진후,‘ 아랫상’에서 조금 떨어진 자리에서 마을 쪽을 바라보고 시작한다. 부정풀이를 할 때는 팥시루떡, 삼색과일, 북어, 술 등을 차려 놓고 잔을 붓고 두 번 절을 한 후 덕담을 하고술을 버린다. 그리고 나서 제물들을 조금씩 떼어 사방으로 던지면서 동네 사람들이 평안하고 잘 되게 해 달라고 기원한다.
고사나 신에게 빌 때에 쓰는 소형의 얄팍한 백지로 보통 한지보다 얇다. 부정풀이가 끝난 후 아랫상에서 당주를 비롯한 사람들 몇 명이 각각 잔에 술을붓고 두 번 절을 한다. 그 다음 제사상을 들고 당집 앞에서 제사를 지낸다. 아랫상에서 지내는 것은 정식 제사가 아니므로 축문을 읽지 않고, 당 앞에서만 축문을 읽은 후에 태운다. ‘고시래(고수레)’를 하고, 올라간 사람들끼리 간단히 음복을 하였으며 사고지에 북어포와 덜어 낸 제물을 싸서 짚주저리에 묶어 두었다.

당집에 꽂아둔 사고지. 사고지에 싼 제물을 당집에 꽂아 두면 당제는 끝이 난다.

예전에는 당 앞에서 지내는 제사까지 끝나면 남자들이 아랫상이 차려진 곳에 모여서 음복을 하였는데, 2005년에는 제사가 끝나고 난 뒤 당주 집에서 음복을 하였다. 당제를 지내고 난 뒤 3일 후, 당주 내외는 목욕재계를 하고 밤 서너 시경에 아랫상에 올렸던 쌀로 메를 지어서 당에 올라가 고사를 지낸다. 이때 올리는 메를 ‘조라밥’이라고 부르며, 조라밥까지 올려야 당제가 모두 끝나게 된다.
【자료 출처 : 「시흥시사(始興市史)」 제5권 <시흥 농촌사람들의 생활과 문화> 中】

김경혜 기자 niba845@hanmail.net

<저작권자 © 시흥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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