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특별 기고>
이종근 부천시흥원예농협 조합장 |
어린 시절부터 11월이 좋았다. 이른 아침, 수확이 끝난 빈 들판을 걸으면 서리가 내려 서걱거리는 소리가 좋았고, 정신이 번쩍 들 만큼 쨍하고 쌀쌀한 날씨가 좋았다. 무엇보다 그 시절 우리네 부모들은 너나없이 농사를 짓는 경우가 많았는데 11월은 봄부터 가을까지 고생하던 그분들의 허리가 드디어 펴지는 시기였다.
법정기념일인 농업인의 날이 11월 11일인 건 여러 측면에서 의미가 있다. 흙에서 나서 흙을 벗 삼아 살다가 흙으로 돌아가는 농민의 삶을 ‘土月土日’로 상정했고 이 한자를 숫자로 풀면 11월 11일이 된다는 점에 착안한 것이다. 나의 어린 시절 마음처럼 농민들이 한 해 농사를 마치고 쉴 수 있는 시기라는 점도 고려됐다.
올해 수원에서 열린 제28회 농업인의 날 기념식에는 대통령이 참석해 “농민들이 스마트팜, 수직농법 등에 관심을 가져주길 당부”하는 한편 “청년들이 세대를 이어가며 농업을 혁신할 수 있도록 정부가 지원하는데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농민의 고령화 문제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60살이면 젊은 축에 속하는 농민들이 IT(정보기술)와 AI(인공지능) 기술을 익혀 농업에 적용하는 건 그야말로 어불성설이다. 소비자와의 직거래조차 도무지 엄두가 나지 않는다고 말하는 농민이 많은 게 현실이다.
최근 로컬푸드에 관해 다룬 한 방송프로그램을 보면서 생각이 많아졌다. 농장에서 생산된 딸기가 경매시장을 거쳐 소비자의 식탁에 오르기까지 약 200㎞, 50시간이 소요된다는 내용이었다. 심지어 여러 단계를 거쳐 생산지로 다시 돌아오는 역유통 현상까지 발생할 뿐 아니라, 농민이 판매한 금액과 소비자의 구매 가격 격차가 10배 가까이 발생하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식품의 맛과 신선도 하락은 물론 환경오염이 뒤따르는 건 말할 필요도 없다. 이러한 현실을 농민이 모르지 않고, 소비자가 짐작 못하는 바 아닌데 왜 달라지지 않는 걸까?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정책과 구조의 미숙함에서 기인했기 때문이다.
농업인의 날이 단순한 연례행사로 그치지 않길 바란다. 농업이 그리고 농민이 당면한 문제에 대해 진지하게 고찰할 수 있는 뜻깊은 기념일이 되길 희망한다. 코로나19로 교역이 끊겼을 때 전 세계가 로컬푸드의 중요성을 깨닫지 않았나. 결국 농업은 농민만의 문제일 수 없음을 뼈저리게 확인하지 않았던가.
코로나19가 한창이던 2년 전 착공해 지난해 문을 연 우리 농협의 매화 로컬푸드직매장에 매일 이른 아침 방문해 농산물을 진열하는 농민과, 지역에서 생산한 농산물을 구입하기 위해 기꺼이 방문하는 소비자를 마주하면 새삼 감사한 마음이 든다. 더불어 우리 농업의 미래에 대한 범국민적 모색이 반드시 필요한 시점이라는 생각이 뒤따른다.
shnews j5900@cho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