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월요단상】
안병순 공익활동가 |
2022년 기준 우리나라 인구는 51,692,272명이고, 아파트 거주인구는 29,420,222명이다(통계청 인구총조사 및 주택총조사 2023. 7. 27. 갱신자료 참조). 그러니까 인구의 57%가 아파트에 거주하는 셈이다. 필자는 한시적으로 시흥지역 아파트단지를 순회하며 방문 활동(사적 활동 아님)을 하는 일을 한다. 근래에 건축된 아파트를 출입하다 보면 누구나 으레 느끼는 그런 것이 있다. 도저히 알 수 없는 국적 불명의 아파트 이름이나 단지 내 시설 명칭을 보는데 어느 나라에 와 있는지 잠시 혼동을 느낄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이른바 박사라는 사람들도, 최고 학부를 나온 사람들조차도 모르는 국적 불명의 아파트 이름이 전국 방방곡곡(특히 대도시)에 난무하고 있음을 본다. 시흥만 보더라도, 포레마제, 베르디움, 인스빌, 펜테리움, 린(인명), 루벤스(인명) 등등, 복합어, 신조어, 외국인명, 보그체(굳이 외국어로 표현하거나 이해에 불필요한 수사를 덧붙이는 대중문화 및 상업계의 과시 행태를 풍자하는 문체) 등이 뒤섞여 보는 사람들에게 당최 무슨 뜻인지 알 수 없게 만든다. 대략 유추하여 자기만의 해석을 할 뿐! 게다가 이름도 매우 길어지는 추세다. 시흥장현금강펜테리움센트럴파크(15자), 엘에이치시흥시청역트리플포레(14자) 등이 예다.
몇 개의 포털을 가동해 검색하여 대략 분류해보니, 영어, 프랑스어, 라틴어, 독일어, 독일어, 스페인어 등이 쓰인다. 그런데 그 외국어만 쓰이는 게 아니라 국어와 외국어가 혼합되어 독특한 ‘천하의 새로운 언어’로 둔갑해 있다. 그야말로 외계어일 듯. 정보취약층이나 지적약자층은 물론 식자층도 도저히 알 수 없을 것 같다. 심지어 그곳에 거주하는 입주민들조차도 지식수준이나 나이의 고하를 막론하고 (한국인은 머리가 좋다고 믿으므로) 그저 사진으로 찍듯이 기억하거나 익숙해질 때까지 외울 것이라고 생각하면 지나친 것일까!
그뿐만 아니다. 아파트단지 내 시설명은 그야말로 온통 영어로 도배되어 있음을 본다. Community Center, Kids Center, Book Cafe, Library, Conference Room, Security, Silver Lounge, Fitness Club 등등 영문 그대로 쓰인다. 국어와 영어의 병기도 아니다. 「국어기본법」(2005년 제정)에는 공문서 작성 시 정확한 뜻 전달과 전문어 신조어일 경우 국어를 기본으로 적되 괄호 안에 병기할 수 있도록 해놨으나 민간영역은 어떻게 할 수 없나 보다. 최근에 지어진 아파트를 방문할 때마다 미국인지 한국인지 분간할 수 없을 정도이다.
그동안 이른바 아파트 애칭(pet name)이 우후죽순처럼 만들어져 국어의 체계와 질서를 흐트러뜨려 세상을 심하게 어지럽히고 있다. 이는 민간기업의 상술과 아파트 가격을 올리려는 입주민 등이 합심하여 만든 결과라고도 말한다. 특히 공기업인 LH의 아파트 이름짓기는 매우 심각하다. 길고 어려운 외국어가 혼합된 말로 이름을 짓고 있어 모범을 보이지 못할망정 국어를 왜곡하고 언어생활을 아주 혼탁하게 만드는 데 앞장서고 있으니 개탄스럽다.
「국어기본법(제4조)」국가와 지방자치단체는 정신상‧신체상의 장애로 언어 사용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국민이 불편 없이 국어를 사용할 수 있도록 필요한 정책적 지원을 하도록 하고 있다. 하지만 무슨 일인지 사정상 학력이 낮거나 아직 영어를 배우지 못한 사람들을 지원한다는 말은 없다. 자신이 사는 집의 이름을 자신도 알 수 없는 이름일 때, (길거나 어려워서) 외우지 못한 이름일 때, 그들은 정신적으로도 길거리에서도 미아가 되고 만다.
예의 법률이 제정된 이후 일부 지자체에서는 「국어 바르게 쓰기 조례(경기도)」,「국어 사용 조례(서울시)」「국어 진흥 조례(구로구)」 등을 제정하여 시행하고 있다. 현재 시흥시는 조례가 없는 게 확인된다. 서울시는 최근 ‘새로 쓰는 공동주택 이름 길라잡이(2024)’를 작성하여 배부하였다. 2022년부터 2023년까지 1년간 세 차례의 시민과 전문가 등과 함께 토론회를 열어 얻은 성과를 정리한 것이다. 여기서 서울시는 “길고 어려운 이름 그만… 서울시, 부르기 쉽고 알기 편한 아파트 이름 짓기”를 제안하며 참여를(공기업, 민간기업, 시민 등) 적극적으로 권장하고 있다. 경기도 조례에서도 관련 법률에는 없지만 이채롭게 옥외광고물 문자는 어문규정에 따르되, 외국 문자로 표시할 경우는 특별한 사유가 없으면 한글과 병기하도록 하였다.
외국인들도 읽을 수 없고 이해할 수 없게 쓰이는 외국어류(보그체, 복합외국어, 애칭, 신조어 등)로 된 아파트 이름, 보통의 내국인도 참으로 이해하기 어렵다고 한다. 아주 많이 배운 지식인층도 이해하기 어렵다고 한다. 학교에서 관공서에서 병원에서, 출입국 시 등에서 적어내야 할 경우가 많은 집이름이지만, 많이 배운 사람도 그의 벗도 지인도 그것을 듣고 받아 적을 때 우리는 제대로 적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 도대체 누구를 위한 아파트명인지 알 수 없다. 글과 말은 시민의 정신과 문화, 나라의 정체성과 결부된 아주 중요한 문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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