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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혀진 시흥시 옛마을 이름을 찾아서】

기사승인 2024.07.26  11:5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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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흥군 관내도 「시흥군세일람(1936년)」.

옛 시흥군의 소래면, 군자면, 수암면이 합쳐져 1989년 1월 시로 승격할 당시 인구 9만3천여 명의 시흥시는 이후 급성장하며 2023년 1월 말 현재 인구 57만1천여 명에 이르렀다.

개발 과정에서 옛 자연마을의 상당수가 도시화로 사라졌고 정겨운 예전 마을지명도 점차 잊혀져 갔다.

이에 시흥신문은 시흥문화원이 발간한 「시흥시 지명유래」를 참고, 시흥지역의 옛마을이름을 소개한다. -편집자 주-

 

◇ 목감동(牧甘洞)

<물왕동‧산현동‧조남동‧논곡동‧목감동>

목감동은 시흥시 중심부에서 동쪽에 위치한다. 동북쪽으로 안양시, 남쪽으로 안산시, 서쪽으로 연성동, 북쪽으로 매화동과 경계를 이룬다. 조선시대 이 지역에 ‘목암사(木岩寺)’라는 절이 있었는데 경내의 단감나무가 유명하였다고 한다. 절 주변에 마을이 형성되자 목암사의 ‘목’자와 단감나무의 ‘감’자를 따서 ‘목감’이라 했다는 데서 동명이 유래하였다.

【2】 산현동(山峴洞)

조선시대에는 안산군 초산면의 산현리(山峴里)와 궤곡리(樻谷里)였다가, 1912년 2월 5일 안산군의 동리 구역과 명칭을 변경할 때 산현리로 통합되었다. 1914년 3월 1일 안산군이 시흥군과 수원군으로 분리 통합될 때 시흥군에 속하게 되었고, 같은 해 3월 13일 옛 안산군의 군내면‧잉화면(인화면)‧초산면이 통합되어 수암면이 설치되면서 시흥군 수암면 산현리가 되었다. 그 뒤 법률 제4050호에 의해 시흥군 소래읍‧군자면‧수암면이 시흥시로 승격되자 시흥시 산현동이 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조선지지자료(朝鮮地誌資料)」(1911년 경) 안산군 초산면에는 산현리를 ‘뫼재’로, 궤곡리의 궤곡을 ‘살듸골’로 부른다고 기록되어 있다.

= 사티골(生谷)

주위가 온통 산으로 둘러싸인 오지마을로, 임진왜란 대 인근 마을이 모두 폐허가 되었으나 이곳은 산간벽지의 마을이라 아무런 피해가 없었다고 한다. 그후부터 살 곳은 이곳 밖에 없다고 하여 ‘살대곡’이라 했다가 시대가 흐르면서 ‘사티울’로 되었고 현재는 ‘사티골’이라 부른다. 또 조선시대에는 ‘궤화동’이라 하였다가 조선말엽에 이르러 ‘궤곡동’이라 하였다. ‘사티골’은 문화 류씨의 오랜 세거지로 깨꼴 서쪽에 위치한 마을이다.

= 관모산(冠帽山)

골월 뒤(서쪽)에 있는 산으로 관을 쓰고 있는 형상을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하는데 ‘성인산(聖人山)’이라이라 부르기도 하고, 황새가 춤을 추고 있는 형상이라 하여 ‘관무산(鸛舞山)’이라 부르기도 한다. 이외에도 ‘갓뫼산’, ‘갈매산’, ‘갈매봉’ 등 여러 가지로 불린다.

= 누낭고개(淚囊峴)

피흘리고개 서북쪽에 위치한 고개로 묘재와 사티골 사이에 있다. 임진왜란 때 피흘리고개에서 일본군이 관군에 대패하자 일본군 장수가 이 고개에서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고 하여 ‘누낭고개’라 부른다는 전설이 있다.

=막자골

피흘이고개 초입의 골짜기로 피를 막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사당골

깨꼴 뒤(동쪽)에 있는 골짜기로 조선 성종의 사위인 윤섭(1492~1516)의 사당이 있어 ‘사당골’이라 부른다.

= 소죽골

골월과 묘재 사이에 있다.풍수로 보아 구융(구유) 즉 소의 먹이를 담아주는 소죽통처럼 생긴 골짜기이다.

<다음 호에 이어집니다.>

shnews j5900@chol.com

<저작권자 © 시흥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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