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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흥군 관내도 「시흥군세일람(1936년)」. |
옛 시흥군의 소래면, 군자면, 수암면이 합쳐져 1989년 1월 시로 승격할 당시 인구 9만3천여 명의 시흥시는 이후 급성장하며 2023년 1월 말 현재 인구 57만1천여 명에 이르렀다.
개발 과정에서 옛 자연마을의 상당수가 도시화로 사라졌고 정겨운 예전 마을지명도 점차 잊혀져 갔다.
이에 시흥신문은 시흥문화원이 발간한 「시흥시 지명유래」를 참고, 시흥지역의 옛마을이름을 소개한다. -편집자 주-
◇ 목감동(牧甘洞)
<물왕동‧산현동‧조남동‧논곡동‧목감동>
목감동은 시흥시 중심부에서 동쪽에 위치한다. 동북쪽으로 안양시, 남쪽으로 안산시, 서쪽으로 연성동, 북쪽으로 매화동과 경계를 이룬다. 조선시대 이 지역에 ‘목암사(木岩寺)’라는 절이 있었는데 경내의 단감나무가 유명하였다고 한다. 절 주변에 마을이 형성되자 목암사의 ‘목’자와 단감나무의 ‘감’자를 따서 ‘목감’이라 했다는 데서 동명이 유래하였다.
【5】 목감동(牧甘洞)
조선시대에는 안산군 초산면의 목감리(牧甘里)와 율포리(栗浦里)였다가 1912년 2월 5일 조선총독부 경기도 고시 제7호로 안산군 내 동리의 구역과 명칭을 변경할 때 목감리로 합쳐졌다. 다시 조선총독부령 제111호에 의해 1914년 3월 1일 안산군이 폐지되면서 시흥군에 속하게 되었고 같은 해 3월 13일 조선총독부 경기도령 제3호에 따라 시흥군 수암면 목감리로 편제되었다. 그 뒤 지명에 별다른 변화가 없다가 법률 제4050호로 시흥시가 출범함에 따라 시흥시 목감동이 되었다.
조선 정조 13년(1789)에 작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호구총수(戶口總數)」에는 목감리는 나오나 율포리는 보이지 않는데, 이로 미루어 볼 때 율포리는 조선 말기에 새로 편성된 행정구역인 것으로 보인다. 「조선지지자료(朝鮮地誌資料)」(1911년 경) 안산군 초산면에는 목감리를 ‘모감이’로, 율포리를 ‘밤개물’로 부른다고 기록되어 있다.
= 고저지
목감과 조남동 양단말 사이에 위치한 마을이다.밀양 박씨 등이 세거하면서 취락이 형성된 곳으로 마을 지세 높낮이가 심하다 하여 ‘고저지’라 불렀다.
= 더푼물
조선시대에는 광명시 학운동 및 부천 지방에서 안양으로 가는 통로로 서너 가구가 있었는데 도적과 강도 등에 시달려 마을이 없어졌다. 이후 일제 때인 1930년대에 이르러 안양시 박달동에 군용지를 개설하면서 박달동 동수암 출신의 광주 이씨와 파주 염씨 등이 이주하여 취락을 형성, 새로 생긴 마을이라 하여 ‘신촌(新村)’으로 불렀다.
또한, 마을 앞쪽의 산이 문봉인데 풍수로 보아 마을을 덮어 누르는 형국이라 하여 ‘덮은늘’이라고도 하였는데 세월이 지나면서 ‘더푼물’이라 부르기도 했다. 이 마을이 재산이 늘면 문봉에 눌려 30년을 못 간다고 하여 ‘30년 동네’라고도 부르며, 더푼물이라 하여 ‘뚜껑 없는 동네’ 등 여러 갈래로 불리기도 했다.
일설에는 이 마을 정미소와 범고개 마루턱 사이에 우물이 하나 있었는데 오가는 우마로 인해 먼지 등이 날아와 항상 우물을 덮었다 하여 ‘더푼물’이라 했다고도 한다.
<다음 호에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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