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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혀진 시흥시 옛마을 이름을 찾아서】

기사승인 2023.11.24  11:38: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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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흥군 관내도 「시흥군세일람(1936년)」.

옛 시흥군의 소래면, 군자면, 수암면이 합쳐져 1989년 1월 시로 승격할 당시 인구 9만3천여 명의 시흥시는 이후 급성장하며 2023년 1월 말 현재 인구 57만1천여 명에 이르렀다.

개발 과정에서 옛 자연마을의 상당수가 도시화로 사라졌고 정겨운 예전 마을지명도 점차 잊혀져 갔다.

이에 시흥신문은 시흥문화원이 발간한 「시흥시 지명유래」를 참고, 시흥지역의 옛마을이름을 소개한다. -편집자 주-

 

◇ 은행동(銀杏洞)

은행동은 시흥시 중심부에서 동북쪽에 위치하며, 동쪽의 과림동에서 시계 방향으로 매화동, 신현동, 신천동의 순으로 둘러싸여 경계를 이루고 있다.

조선시대에는 인천부 신현면 삼리(三里)였다가, 1914년 4월 1일 조선총독부령 제111호에 의해 부천군이 신설되면서 인천부의 신현면‧전반면‧황등천면이 통합되어 소래면이 되자 부천군 소래면 은행리가 되었다. 1989년 시흥시 출범 당시 안현동과 은행동을 관할하는 행정동으로 개청하였다. 1990년대 초부터 택지개발이 진행되어 법정동 은행동에는 대규모의 아파트 단지가 조성되었다. 마을 주민들의 휴식처로 이용되던 큰 은행나무가 있어 ‘은행리’라고 불리던 마을 이름에서 동명이 유래하였다.

= 현대마을

양지편 서북쪽에 위치한 마을로 바닷물이 들어오던 때 배를 대던 곳이라 ‘배터’라 불렀는데 간척공사로 농경지로 변했다. 1960년대에 계수동 가일 출신 이영신 씨가 농사를 짓기 위해 처음 정착한 후 마을이 형성되었고, 1970년대 ‘배터’라는 마을 이름이 좋지 않다는 주민들의 의견으로 ‘현대마을’로 개칭하였다.

= 능골(陵谷)

매화동 이선이 북쪽 너머에 있는 큰 골짜기로 능을 써도 될 만한 명당이 있다고 한다. 종근당에서 초지로 조성했으며 성주 이씨 선대의 묘가 있다.

= 다복골

길마재 능안에 있는 골짜기로 조선시대 이곳에 어린 소나무가 다복하게 있었다고 한다. 소나무는 일제때 다 베어졌다.

= 대동우물

길마재 아랫말 중앙에 있는 우물로 아무리 가뭄이 심해도 마르지 않았다. 정조 14년(1790) 김치인(金致仁)의 묘를 쓸 때 한번 물이 끊겼다고 한다. 물맛이 좋아 길마재와 가대말 사람들의 공동 식수원이었다가 빨래터로 변했다.

= 도당골

당제를 지내던 곳으로 당재에 사용하던 제구를 보관하기도 하고 , 상여를 두던 자리이며, 마을 사람들이 쓰다가 깨진 그릇을 버리던 곳이다.

= 도리깨뿌리

동력 서쪽 끝에 있는 산뿌리로 장낙골과 가대말 사이에 있던 하천이 이곳에서 만났다.

= 말씨고개

장낙골과 가대말 사이로 42번 국도에 있던 고개이다. 조선시대 수원과 인천을 왕래하던 큰 길이었으며이 고개에 이르러 말에게 먹이를 먹였다고 한다. <다음 호에 이어집니다.>

shnews j5900@chol.com

<저작권자 © 시흥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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