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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혀진 시흥시 옛마을 이름을 찾아서】

기사승인 2024.10.18  11: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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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흥군 관내도 「시흥군세일람(1936년)」.

옛 시흥군의 소래면, 군자면, 수암면이 합쳐져 1989년 1월 시로 승격할 당시 인구 9만3천여 명의 시흥시는 이후 급성장하며 2023년 1월 말 현재 인구 57만1천여 명에 이르렀다.

개발 과정에서 옛 자연마을의 상당수가 도시화로 사라졌고 정겨운 예전 마을지명도 점차 잊혀져 갔다.

이에 시흥신문은 시흥문화원이 발간한 「시흥시 지명유래」를 참고, 시흥지역의 옛마을이름을 소개한다. -편집자 주-

◇ 목감동(牧甘洞)

<물왕동‧산현동‧조남동‧논곡동‧목감동>

목감동은 시흥시 중심부에서 동쪽에 위치한다. 동북쪽으로 안양시, 남쪽으로 안산시, 서쪽으로 연성동, 북쪽으로 매화동과 경계를 이룬다. 조선시대 이 지역에 ‘목암사(木岩寺)’라는 절이 있었는데 경내의 단감나무가 유명하였다고 한다. 절 주변에 마을이 형성되자 목암사의 ‘목’자와 단감나무의 ‘감’자를 따서 ‘목감’이라 했다는 데서 동명이 유래하였다.

【3】 조남동(鳥南洞)

조선시대에는 안산군 초산면 조남리(조남리)와 제청리(제청리)였다가, 1912년 2월 조선총독부 경기도 고시 제7호로 안산군의 동리 구역과 명칭을 변경할 때 조남리로 합쳐졌다. 조남리 지명은 광복 이후까지 별다른 변동없이 지속되다가 1989년 시흥시 승격으로 인하여 시흥군 조남동이 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조선 정조 13년(1789)에 작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호구총수(戶口總數)」에는 초산면 소속으로 ‘조남리’와 ‘제청리’가 보이지 않는다. 한편 「조선지지자료(朝鮮地誌資料)」(1911년 경) 안산군 초산면에는 조남리를 ‘새암이(鳥南里)’로, 제청리를 ‘장군잿(祭廳里)’로 부른다고 기록되어 있다.

= 장자터

사래기 서남쪽의 마을로 황한농장(조남동 산76) 자리에 조선시대 큰부자가 살았다 하여 ’장자터‘라 불렀다. 달성 서씨와 밀양 손씨 등이 세거해온 마을이다.

= 군관이들(軍官坪)

남왕 극동기연 공장 주변 일대를 일컫는다. 「조선지지자료」에는 “조남리 앞에 있는데 임진왜란 당시 진을 쳤던 곳이라”라고 기술되어 있다.

= 녹색골

새미 뒤(북쪽) 산 너머에 있는 골짜기로 장승박이에서는 서남쪽이 된다. 이 골짜기에 나무와 숲이 우거져 ’녹색골‘이라 했는데, 지금은 대부분 지역이 산골이고 일부는 농경지이다.

= 능모래이

남왕 주막거리와 장군재 사이의 산모퉁이를 말한다. 조선시대 능 후보지였다고 한다.

= 달들

새미 아랫말 앞(서쪽)에 있는 들로 천수답이었으나 1980년대 이르러 지하수 개발로 인해 수답이 되었는데 ’다니들‘이라고도 한다.

= 도깨비골

응달말 절골 동쪽에 있다. 비가 오면 도깨비가 나타난다고 하여 ’도개비골‘이라 불렀는데, 특히 달걀귀신이 많았다고 한다.

=뒤골

남와 뒤에 있는 골짜기로 ’뒷골‘이라 불렀으며 이곳에 김해 김씨 구직파 선대의 묘가 있다.

<다음 호에 이어집니다.>

shnews j5900@chol.com

<저작권자 © 시흥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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