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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보는 밤은 언제나 고비의 시간

기사승인 2023.11.03  16:0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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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월요단상]

김윤환 사랑의은강교회 담임 목사

(시인, 백석대 대학원 기독교문학 교수)

만추의 계절을 맞아 한 해를 결산해야 할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 세상은 언제나 흉흉하고 수선스럽지만 돌아보면 그래도 따뜻한 가족과 이웃이 있어 우리의 삶은 견딜 만했다. 스산한 시절이지만 우리의 영원을 어루만지는 시와 함께 늦가을을 보내길 소망해 본다.

먼저 우리의 영원한 시인인 윤동주의 시 한 편을 감상해보자.

“돌아와 보는 밤 / 윤동주 // 세상으로부터 돌아오듯이 이제 내 좁은 방에 돌아와 / 불을 끄옵니다 불을 켜두는 것은 너무나 괴로운 일이옵니다 / 그것은 낮의 연장(延長)이옵기에 // 이제 창을 열어 공기를 바꾸어 들여야 할텐데 / 밖을 가만히 내다보아야 방안과 같이 어두워 / 꼭 세상 같은데 비를 맞고 오던 길이 / 그대로 비속에 젖어 있사옵니다 // 하루의 울분을 씻을바 없어 가만히 눈을 감으면 / 마음속으로 흐르는 소리 / 이제 사상이 능금처럼 저절로 익어 가옵니다.”(1941. 6 作)

이 시는 마치 성경 속 욥의 일기를 보는 듯하다. 윤동주 시인이 옥사한 것이 일제 말 1945년 2월이었고 이 시를 쓴 때가 1941년이었으니 이때는 일제가 전쟁에 광분하여 조선은 물론 일본과 아시아 전체를 어둠으로 몰아넣던 시기였다.

식민지 조선의 청년 윤동주 시인은 어둠과 절망과 울분이 빗물처럼 자신을 적시고 있었음을 부정하지 않는다. 작위적인 희망을 함부로 구사하지 않는다. 그의 내면에 자리한 기독교 사상은 고통을 부정하지 않고 수용하지만, 결코 절망에만 머물 수 없는 영적 갈급함을 노래하고 있는 것이다. 마치 욥이 자신에 닥쳐진 고난을 이유도 모른 채 감당하기 어려운 긴 씨름을 했던 것처럼 시인은 고통의 사유를 통해 자신과 민족공동체 그리고 인류의 제한성을 시로 노래하는 것이다.

무기도 없고, 동지도 사라져가는 절대 고독과 두려움의 시간을 살았던 시인 윤동주의 노래는 엄숙한 종교주의가 아니라 인간의 나약함과 죄악에 대하여 신에게 계속 질문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 이 시간에도 고난에 처한 신자가 있다면 윤동주의 어둠, 욥의 고통, 예수의 수난을 성경과 함께 묵상해길 바란다. 자신의 고난이 결코 자신만의 문제가 아니라 바로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고민이자 근심이 되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행여 고난을 이유로 입술과 행실의 죄를 범하지 않는 묵상과 간구의 시간을 회복하게 될 것이다. “우리가 하느님의 손에서 좋은 것을 받으며 또 나쁜 것을 받지 않겠느냐? 하고 이 모든 일에서 욥이 자기 입술로 죄를 짓지 아니하니라” (욥기 2:10)

이어서 현제 중견시인으로 활동하는 안상학 시인의 시를 함께 읽어보자.

“고비의 시간 / 안상학 // 지나온 날들을 모두 어제라 부르는 곳이 있다 / 염소처럼 족보도 지금 눈에 있는 어미나 새끼가 전부 / 지나간 시간들이 모두 무로 돌아간 공간을 보며 살아가는 / 황막한 고비에서는 / 그 이상의 말을 생각할 그 무엇도 까닭도 없으므로 // 남은 날들을 모두 내일이라 부르는 곳이 있다 / 펌프가 있는 어느 작은 마을 / 사람이라곤 물을 길어 가는 만삭의 아낙과 / 뒤따라가며 가끔 돌아보는 소녀뿐 /시간이 오고 있는 것이 보이는 황황막막한 고비에서는 / 굳이 그 이상의 말을 만들 어떤 필요도 없으므로 (...후략...) (시집 『남은 있는 날들은 모두가 내일』, 2020.10)

무언가 정리한다는 것은 무엇을 버리는 일과 다르지 않다. 시인은 고독을 오롯이 누리기 위해 상처 난 어제를 미워하지 않으며, 잃어버린 것에 대하여 탄식하지도 않고 그 슬픔을 결코 외면하지도 않음을 노래하고 있다. 인간이 자신을 알아가는 때는 언제나 ‘고비의 시간’이다. 연약함으로 빚어내는 희망의 노래가 하늘에 닿는 것은 숱한 변명보다 빈손의 겸손과 비워냄의 기도가 있기 때문이리라. 지금 우리에게는 마치 구전가요 ‘엄마의 약손’처럼 아픔을 회피하지 않고 가장 일상적인 언어와 가장 낮은 목소리로 조분조분 할머니께 말하듯 하늘께 말하는 시간이 필요하다.

시인의 노래처럼 ‘남은 날들은 모두 내일’이라는 시간에 굳이 말이 필요 없는 고요한 교감을 시간의 주인이신 하느님과 마주하며 눈으로 소곤소곤 이야기하고 싶은 고비의 시간을 넘어 내일로 가고 싶다. “하느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들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도다”(전도서 3:11)

shnews j5900@cho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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